복음적 사회선교를 위한 새벽이슬
 



확실히 들었는가.
 이문주  | 2009·03·27 13:07 | HIT : 3,058 | VOTE : 618 |
(서울신대 개강모임 때 나눈 말씀입니다.)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확실한 들은 사람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잠21:28)



“증인(證人)”은 법정용어입니다. 증인이란 과거에 경험한 사실을 법원에 보고할 것을 명령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증인은 경험사실을 보고하는 자이지 결코 자기 의견이나 상상한 바를 진술하는 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증인의 말, 곧 증언의 신빙성은 그가 얼마나 객관적이고 정직한 자세로 경험사실을 진술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증인의 증거력은 매우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증인은 최악의 증거”라는 법언(法諺)도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명 마녀사냥, 사또재판이 그것입니다. 전근대적 재판제도 아래에서는 조작된 증인들이 무수히 동원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재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날조된 증거와 동원된 증인들로 이루어지는 졸속재판은 “진실을 감옥에 가두어두는” 악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은 영원히 묻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여기에 앞장섰던 이들은 역사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이스라엘에서도 증인에 의한 증거재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십계명 중 제구계명이 거짓증거, 곧 위증을 막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사회적 정의를 떠받드는 계명이라 할만합니다. 율법은 이러한 제구계명을 더욱 자세히 규정해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3절은,

“1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2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며 3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하지 말지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위증하는 자는 악인과 연합하는 자로 취급되고 있으며, 민중재판의 부당성을 경고하고 있고, 불편부당한 공정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판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두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명기에서는 한층 자세한 구절이 나타납니다. 신명기 19장 15-21절은,

“15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16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17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18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19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20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21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증인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 명이 아닌 두, 세 명의 증인의 말로 사실을 확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증을 막기 위해 대질신문을 하도록 하고 있고, 위증인 것으로 판명되면 그가 모함하려던 대로 그를 처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위증하는 자는 악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유명한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이 나옵니다. 사실 여기에서의 말씀은 그의 사정을 보아주지 말라는 의미가 큽니다(“긍휼히 여기지 말라”). 이에 따르면 형제를 살인자로 모함한 자는 살인죄를 추궁해야 하고, 폭행과 상해죄로 모함한 자에게는 폭행과 상해죄로 처벌하여 똑같이 보복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구약의 율법은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은,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증인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 증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권고를 마지막으로 행하고 그마저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으로 여기라, 곧 공동체에서 내쫓을 것을 명하십니다. 당대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단 하나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것은 엄청난 징벌이자 확정적 선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징계였습니다. 곧 그에게 구원이 없다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증인이란 엄청난 권세를 가진 자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활승천하시면서 우리를 증인이라고 칭하셨습니다(행1:8). 이것은 우리의 지위를 한층 더 고양시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 부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유일한 증거라는 예수님의 고백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내어 맡겨놓고” 가신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구원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재판을 세상에 열어놓고 우리의 증언을 기다리는 원고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증인이 되어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증언할 수도 있고, 예수님이 구원자가 아니라고 위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러한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 권세에는 엄청난 의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율법이 밝혀놓은 바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입니다. 위증자는 처벌받을 것이고 게다가 그가 꾀한 형벌을 직접 받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선포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단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신 이 재판은 결과가 이미 도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증언은 그 뻔한 결과를 뒷받침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복음 전하는 자를 저주하였습니다(갈1:7-9). 증인이 그의 의무를 권세로 여기는 것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증인은 결코 진실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무식하며 무시무시한 결과에 빠지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확증에 있습니다.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의 권세는 이 땅과 하늘의 일을 맺고 푸는 정도에 이릅니다. 단 두 사람의 합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 예수님께서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째서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권세가 주어졌으며, 이것은 바르게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증인이 아닌 참된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세상에는 거짓 증인과 참된 증인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잠언 말씀은 이를 구별해주는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이것은 오직 결과로써만 판가름 납니다. 거짓 증인은 패망하게 되고 그 말을 믿는 자는 멸망하게 됩니다(NIV). 그러나 참 증인의 말은 살아 있어서 계속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은 절대 이 패망의 길을 뒤따르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거짓 증인의 말은 세상의 시류를 따라 점점 쇠락하는 이 세계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는 것이며, 한심스럽게도 반성 없이 끊임없는 성장과 발전에 대한 확신을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증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인격과 이 세계를 파탄내고 있습니다. 개인들은 마취당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만치 나약한 심성을 가지게 되었고, 세상은 투기와 탐욕으로 점철되어 제 살을 깎아먹는 줄도 모르고 방탕에 빠져서 회복불능의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증에 속지 말아야 하며, 역사적으로 패망의 길로 확증되었던 과거들을 끊임없이 곱씹어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확실히 보고, 들어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주님을 만나서 주님으로부터 듣고, 그 모습과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전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하지 않고서 진정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로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객관적인 자세로 주님이 주신 공명한 심성을 기반으로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야기에 겁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전도이자 영향력입니다. 우리의 신뢰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증언이 세계사의 증언이 되도록 우리의 경험, 말, 삶 자체가 진실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 학기에 우리의 캠퍼스의 삶이 증인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방학 동안 다양한 일을 겪었을 것이나, 우리는 또한 무엇을 보고 들었던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느 때에나 우리의 증언과 다른 증언을 하는 참소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 그들의 그것만큼 생생하지 않다면 우리의 말이 힘이 있고 살아 역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난 시간의 경험과 깨달음을 기를 쓰고 생생히 몸에 담아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우리는 주의 말씀과 세상의 현실에 대해 눈에 불을 켜고 매달려야 합니다. 이번 1학기가 새벽이슬의 증언으로 캠퍼스를 울리는 한 학기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1]  MD채현 09·04·01 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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